9개만 쓰면 부족하고 11개는 많은 것 같아 10문장을 쓴다고요?
<들어가며>
사람들은 숫자에 대한 강박이 있습니다.
3
집단을 이루는 최초의 숫자이자, 완전무결한 삼위일체를 나타내죠. 수많은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고, '분할'이 아닌 '분배'의 개념이 도입되는 첫 숫자입니다. 홀수라는 특성상 불균형과 안정감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2:1의 상태가 되면 불균형이 되지만, 1:1:1의 상태라면 무엇보다 안정적인 상태가 되죠. 이는 조형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사각형의 무게중심보다 삼각형의 무게중심이 더 아랫쪽에 위치합니다. 물리적으로도 세변의 변형이 가장 적은 트러스 구조가 각종 건축에 쓰이곤 하죠. 이처럼 심리적인, 관습적인, 상징적인, 조형적인 기타 등등의 이유로 숫자3은 우리에게 '완전한/안정적인' 존재가 되어 왔습니다. 기업의 핵심가치나 인재상도 대부분 3가지로 규정됩니다. 기업이 추구하는 수많은 니즈를 안정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액션이었겠죠.
7
7의 역사는 수메르문명에서도 드러날 만큼 오래되었습니다. 이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인간이 육안으로 관측가능한 천체의 갯수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7에 대한 강박이 만든 인위적 구분인지 헷갈리긴 하지만 인간의 최단기 기억의 한계수가 7개의 청크라고 알려져있고, 빛의 스펙트럼또한 7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7은 중앙의 1개 요소와 각 양쪽의 3개씩 요소들로 나눌 수 있어, 권력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7개 이상 가짓수가 나열되면 그때부터 뭔가 많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8부터는 확실히 느낌이 달라요. 8은 4/4로 나뉠 것 같은 느낌을 주고, 9는 3/3/3으로 나뉠 것 같은 느낌을 주죠. 7은 분리시킬 수 없는 나열값의 최대치라는 느낌을 줍니다. 한자리 수의 마지막 소수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더불어 묘한 균형감, 왠지 행운가득한 숫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대부분의 '나열되는 요소'에선 7개의 명사가 활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LDRSHIP라고 불리는 미육군의 핵심가치는 충성, 의무, 존경, 봉사, 명예, 정직, 용기로 7가지입니다. 오늘의집, 원익그룹 등 많은 기업들도 7가지 핵심가치를 나열하죠. 신년을 맞아 7대목표를 설정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습니다. 선거 때마다 공약을 말할 때도 7대공약이라는 말은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신기하죠?
10
10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결한 숫자 취급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리스트들이 10가지로 규정되곤 합니다. 구글의 전직 People Operations 부문 총괄 수석부사장 라즐로 복(Laszlo Bock)은 '구글의 10가지 Work Rules'을 공유했습니다. 자포스도 10가지의 핵심가치를 지니고 있죠. 동아쏘시오그룹은 10가지의 '두돈텐텐'이란 행동규정을 만들었습니다. 독특하게 10가지 뭐뭐뭐는 공공기관도 엄청 애정하는 듯 한데요. GH(경기주택도시공사)는 10가지 일하는 방법을, 행정안전부는 '조직문화 혁신10' 선언을, 광주광역시는 2021년 조직문화개선 10가지 약속, 인사혁신처는 '조직문화바꾸기 10대과제', 아산시도 '양성평등 조직문화 10가지 실천약속', 국립수산품질관리원에서도 '조직문화 혁신10가지'원칙을 만들었습니다.
10가지라는 것이 손가락 10개에 다 들어가기도 하고, 어감도 좋고, 완결성도 있어보이고, 뭔가 딱 떨어지는 것이 아주 훌륭한 숫자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보통 이런 10가지 어쩌고는 '단어'가 아니라 '문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명사는 7가지로 귀결되는 반면, 문장은 10~11가지 정도로 정리하려는 경향이 있죠. 재미있는건 보수성을 띠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일수록 10을 지키려고 하고, 여기에 살짝의 변주나 파격을 주려는 곳들은 11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아한형제들의 송파구에서 일 잘하는 11가지 원칙도 그러했고, POS서비스 스타트업인 페이히어도 11가지 핵심가치를 지니고 있고, LG전자에서도 조주완CEO의 의지에 의해 11가지 REINVENT GUIDE가 만들어졌습니다.
근데, 핵심은. 10가지고 11가지고...사실 그 문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조직문화는 표어가 아닌 행위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은 이미 다들 알고계실거고...그 행위가 뭐냐가 중요할 텐데요. 보통 그것은 '상황'과 '해결'에서 드러납니다.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것이잖아요. 어떤 상황이 닥치냐를 기준으로 우리 조직의 문화를 결정할 순 없을 겁니다. 최근 어떤 기관의 컬처덱을 만들던 도중 구성원들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고객들이 너무 까다롭고, 하나하나 응대할 때 자존감이 떨어져서 그게 조직문화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음...물론 피로도가 높아져 있는 것이 어떤 영향을 끼치긴 하겠지만, 고객의 까다로움은 상황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걸 해결하는 조직의 태도죠. 상처받고 돌아온 구성원에게 '왜 그렇게밖에 못했느냐!' 며 가열찬 채찍을 휘두를 수도 있고, 어머니의 따스한 품처럼 무작정 허그부터 해줄 수도 있습니다. 데이터에 근거해 AI판사마냥 회고를 할 수도 있고, 겁나 쿨하게 시스템을 통째로 바꾸는 시도를 할 수도 있죠.
함수적으로 상황은 x값입니다. 주어진 값이죠. 조직의 방정식은 이 x라는 상황을 어떤 f함수를 이용해 높은 y값으로 변환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상황과 해결의 방정식에서 조직문화가 탄생하는 것이죠.
10가지의 문장 자체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막상 수십개 기업의 10가지 원칙을 놓고 비교해보면 도찐개찐인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태도라는 게 어떤 범주 이내에서 작동하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진짜 작동하는 메시지를 만들려면, 3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봐봐 나도 이거 3개로 정리하고 있는거..)
01
우선, '상황과 해결'의 원리 관점에서 적어야 합니다. 가끔, 어떤 표어를 보면 <윤리적인 부분, 태도적인 부분, 메일쓰는 법, 회의하는 법, 성장의 마인드까지...> 마인드셋과 그라운드룰, 행동강령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일단 이 메시지들은 위계가 다르기도 할 뿐더러, 특정한 상황이 없는 당연한 문장들인 경우가 많아 쉽게 와닿지 않기도 하죠. 회사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어느 정도 패턴화가 되어있습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는 태도에서 우리 문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죠. 우리가 적어야 할 문장은 '어떤 상황에서 우린 이렇게 행동한다.' 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특히 큰 조직일수록 말이죠.
조직이 작다면 반대의 경우도 작동합니다. 작은 조직에선 발생하는 사건과 상황이 다이나믹하게 변하거든요. 오히려 이런 경우엔 상황을 특정하기보단, 전체적인 동기와 대원칙만을 잡아놓는 것이 유연한 문화를 만들 수 있죠. 이 땐 '당위적인 메시지'보다 '정체성과 문화의 특성'이 진하게 드러나는 문장을 위주로 쓰게 됩니다.
02
두번째는...자꾸 '뭐뭐해라!' 라고 명령하지 말라는 겁니다. 10가지 문장을 보면 계속 명령조인데... 가끔 부드럽게 쓴다고 하는 게 '우리는 ~해요!' 라고 1인칭 화법으로 쓰거나, '-합니다.' 정도로 엄근진하게 적어놓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조직문화 선언이란 게 조직의 원칙을 말하는 것인 만큼 어느 정도의 강제적인 메시지로 흘러가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9시1분은 9시가 아니다.>라는 단순한 문장이 사람들 뇌리속에 깊이 박혔던 것은 그게 엄청나게 감동적이거나 기발해서가 아닙니다. '지각하지 마세요!' 라는 명령문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해야 할 기본적인 '생각'을 적어놓았기 때문이죠. 우리는 10가지 문장을 달달 외우고 따라야 하는게 아니라, 그 문장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화 인셉션에서도 한 사람의 행동을 바꾼 건 '사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었다' 라는 단순한 생각 하나였습니다. 행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를 공유하고 그 생각에서 태어난 개인의 행위엔 자율성을 주는 게 중요하죠.
03
마지막은, 10가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단 점입니다. 물론 '글로 적을 때' 10가지는 참으로 안정감을 줍니다. 쓰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속이 편안해지죠. 그러나, 그건 그냥 10개가 한 뭉태기로 있을 때 얘깁니다. 조직문화는 그렇게 뭉태기로 돌아다니지 않아요. 각각의 경험에서 만들어지죠. 모든 상황에 대응할 대원칙 하나만 적을 수도 있고, 50가지 상황에 대응하는 미친 메뉴얼북처럼 만들어질수도 있습니다. 8가지든 13가지든 가짓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조직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그걸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를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
해결방식을 세세하게 나누는 것 또한 그 조직의 문화일 것이고,
대전제하나로 자율과 책임을 부여하는 것도 그 조직의 문화일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든 조직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니 나쁠 것이 없지만, 10가지로 숫자를 맞추기 위해 이런저런 문장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죠.
최근 굉장히 충격적인 발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리더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어요.
"아, 뭐 직관적인 것도 좋지만...그래도 구색상 10가지 정도가 딱 있어야.... 보는 사람도 어? 좀 그렇지 않나? 3개도 아니고 2개만 있는 건 좀...나사빠진 느낌인데..."
우린 미학적으로 멋진 표어를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세로길이가 가로보다 긴 문장더미를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의 원칙을 정하는 거잖아요. 그게 한 문장이든 일곱 문장이든 뭐가 중요한가요. 있어야 하면 있는거고, 필요없으면 쳐내는 것이 맞죠. 여러분도 조직문화를 기록하시면서 숫자의 상징성에 많이 갇히게 되실 거에요.
3가지 핵심가치
5가지 핵심가치
7가지 핵심가치
10가지 문장
11가지 원칙
등등... 말이죠. 넘버링을 하지 마세요. 조직문화의 원칙에 순서는 필요없습니다. 어차피 1번이라고 지키고, 2번이라고 그 다음에 지키는 게 아니니까요.
필요하면 적고, 필요없으면 빼세요.
우리 것이면 적고, 남의 것은 빼세요.
지킬 수 있으면 적고, 지킬 수 없으면 빼세요.
중요한 건 이것뿐입니다.